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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의 편지

by 달빛도 머무는 웃음 2023. 10. 20.

데미안의 편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편지에서 꿈의 해석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만족스러운 답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뒤 도움을 줄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의 이름은 피스토리우스였으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는 편지에 등장한 아브락사스를 설명해 줍니다. 

 

아브락삭스는 지공의 선인 동신에 극한의 악입니다. 다시말해 아브락삭스는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한 존재 즉 , 밝은 세계 만을 포용하는 신이 아니라, 선과 악을 넘어선 초월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피스토리우스 이야기에 감명받은 에밀 싱클레어는 한동안 그와 만나며 지적교류를 나누기도 합니다. 시간이 흘러 내적으로 성장한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의 말이 모두 진리는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떠납니다. 

 

또다시 시간이 흐른뒤 어느 날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집을 가봅니다. 비롯 데미안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 대신 한 여인의 사진을 보게 됩니다. 사진을 본 싱클레어는 흠칫 놀랍니다. 사진 속 여인은 그동안 싱클레어가 꿈속에서  보았고 찾아 헤매던 여인이라는 깨달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 대한 싱클레어의 사랑은  고귀하고 운명애적 사랑이었으며 삶을 약동하게 하는 근원적인 힘과같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만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녀는 데미안의 어머니 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에바였으며 이미 싱클레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힘을 주는 존재였습니다. 

 

데미안을 다시 만났을때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너는 언젠가 나를 다시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그럴땐 너 자신의 내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하며 그러면 내가 너의 내면에 있음을 알게 될 거야 이 말을 남긴 데미안은 정말 사라져 버렸고 싱클레어는 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싱클레어는 거울을 보며  이젠 완전히 데미안과 같은 내자신의 모습을 거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비로소 소설은 싱클레어의 독백을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이상으로 데미안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두 세계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에 담긴 니체의 흔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릴적 싱클레어는 자신의 집에서 두 세계를 목격합니다. 그에 따르면 한 세계는 사랑과 철칙, 교육과 모범의 세계로서 안정된 삶을 바라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밝은 세계입니다. 

 

반면 또 다른 세계는  무질서하고 폭력적이며 강한 악취를 풍기는 세계로서 안정된 삶을 살기 위해선 부정해야하는 세계입니다. 이런 두 개의 세계가 공존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사실 두 세계는 니체가 말한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입니다. 

 

이를테면 싱클레어가 말하는 밝은 세계는 니체가 말한 이성의 공간 즉 아폴론적 세계이며 ,반면 어두운 세계는 니체가 말하는 광기의 세계 즉, 디오니소스적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 싱클레어가 아폴론적 세계와 이오니소스적 세계사이에서 방황하고 , 마침내 극복하며, 최종적으로는 두 세계를 넘어서는 아브락사스적 자유를 누리게 되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크로머의 등장

싱클레어가 맨 처음 겪는 중요한 사건은 바로 크로머의 등장입니다. 안락한 가정에 머무르던 싱클레어가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체험한 최초의 사건이기때문입니다. 크로머에게 시달리던 싱클레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의 죄는 악마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 자체였다. 나는 크로머와 그의 세계에 한발 더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즉 ,크로머를 통해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깊숙이  체험한 싱클레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저 안락한 아폴론적 세계뿐만 아니라 음침한 기운이 치솟는 니오니소스적 세계로도 이루어져 있음을 깨달은 것이며 나아가 우리 모두는 단 한 번의 거짓말과 충돌질만으로도 디오니소스적 세계에 빠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데미안의 등장으로 크로머로 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작중 데미안의 기능은 두 세계에서 방황하는 싱클레어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를 뜻하는 것으로 싱클레어는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여 크로머의 노예에서 과감히  해방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안타깝게도 어린 싱클레어는 아직 나약한 존재였고 따라서 자기삶의  완전한 주인이 될 준비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크로머로부터 해방된 후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싱클레어는 혼자 걸을 힘이 없으므로 크로머에 대한 순종을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데미안은 부모님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자립적인 인간으로 만들려 애셨을 것이다. 

 

다시말해 데미안은 싱클레어가 힘에의 의지를 발휘하여 자립적 삶인 아브락사스적인 인간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싱클레어는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서 해방된 후 어머니의 품속 같은  아폴론적 세계로 피신했습니다. 다시 말해 싱클레어는 두 세계를 초월한 주인의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싱클레어는 힘에의 의지를 충만하게 발휘 할 수 있을 까요 이에 대한 실마리는 성경을 대하는 데미안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미안은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각각 죄인과 의인으로 다루어진 카인과 아벨을 정반대로 해석하는 과감함을 보이는가 하면 또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도둑을 가리켜 도리어 당당한 삶을 살다 간 인물이라고 치켜 세운 곤 했습니다. 

 

이는 선과 악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따르지 않으려는 저항 정신 니체의 반도덕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이부분은 오해가 발생하기 쉬운 대목이므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도덕이라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사회적 담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사회가 규정한 선과 악은 절대적 가치일까요

 

예를 들어 자본주의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부지런함을 선으로 게으름을 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회는 시간관리 비결을 다룬 책들이나 열심히 살라고 외치는 동기부여 전문가들 ,혹은 부지런한 사람들의 성공기를 담은 매체물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부지런함 만이 아폴론적 세계를 살 수 있다고 공론화하곤 합니다. 

 

그 결과 게으름은 점점 더 사회 밖으로 밀려나게 되며 , 심지어는 극복해야 할 악덕으로 굳어집니다. 데미안은 바로 그 같은 도덕 권력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그는 카인이 꼭 죄인이며 왜 게으름은 꼭 악덕인가 하고 묻습니다. 사회가 규정한 선과 악을 비틀기 시작함으로써 사회가 일러준 도덕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도덕을 확립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싱클레어가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선 사회가 규정한 선악을 무조건 따를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선악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주인의 도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상급학교로 진학한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잊은 채  방탕한 나날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이때 데미안과의 이별은 힘에의 의지를 상실한 삶을 뜻하므로 어쩌면 싱클레어의 타락은 당연한 결과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행히 싱클레어는 스스로의 힘으로 방황을 극복합니다. 다름아닌 베아트리체 사랑의 힘으로 그동안의 방탕한 생활을  완벽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이때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을 분석하면 베아트리체는 아폴론적 세계와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결합을 시켜준 역할 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실. 여태껏 싱클레어는 두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크로머에게 압도되었을 땐 디오니소스적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으며 또한 그로부터 탈출한 후엔 다시 가정으로 돌아와 아폴론적인 안정감에 의지했습니다. 또는 상급학교에 진학한 뒤 다시 방탕한 생활 디오니소스적 세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싱클레어는 마침내  두세계 동시에 경험하게 됩니다. 사랑을 통해 두 세계가 통합하는 단계로 성장하게 되지요 이로써 사랑이란 인간의 성장의 필연적 요소임을 헤르만 헤세는 넌지시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싱클레어에게는 갈길이 멉니다.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선 두 세계를 통합하는 단계를 지나 두 세계를 초월한 아브락사스적 자유를 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싱클레어에게 큰 도움을 주는 인물이 피스토리우스입니다. 그는 아브락사스의 의미를 싱클레어에게 처음 알려준 인물물로  싱클레어와 지적 교류를 나누게 되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한 실마리를 깨우쳐 나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살펴볼것은 다음입니다. 피스토리우스에게 실망한 싱클레어가 그를 떠나버리기로 결심한 사건입니다. 

 

이것이 싱클레어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것은 자신에게 아브락사스를 가르쳐 준 사람조차 절대적 진리는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옮긴 사례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라는 알을 깨고 비로소 아브락 사스에게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후반부에 에바 부인을 만나고 운명적 사랑을  느낍니다. 

 

베아트리체에게 느꼈던 디오니소스적인 사랑과는 달리 초월적이고 근원적인 사랑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니체식으로 해석하면  아모르파티 즉 운명애라 할 수 있습니다. 아모르파티란 쉽게 말해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로써 니체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고 포용하며 심지어는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니체가 말하는 아모르파티란 주어진 운명을 순응하는 수동적 태도가 아닙니다. 진정한 아모르파티란 인생의 모든 고난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분투하는 그야말로 치열한 능동성을 나타내는 삶을 의미합니다. 데미안을 읽고 조금 해석이 미흡했던 부분이  니체철학의 두세계와 힘에의 의지로부터   분석하고 해석하고 보니 좀 더 분명하고 명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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