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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달빛도 머무는 웃음 2023.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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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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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곡성에서 농사를 짓는 , 가톨릭농민회 초장기 멤버였다.
나는 그를 대학 시절 만났다. 당연히 아버지 덕분에 , 나는 어머니가 삶아 놓은 닭 두 마리를 머리에 이고 십분 남짓 걸어가면서 속으로 오만 욕을 다했다. 
 
지들이 먹을 건 좀 들고 오든가. 그시절 반내골에는 버스조차 다니지 않았고, 두 시간을 걸어온 그들이 먹을 걸 들고 온다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나의 욕은 다만 햇볕이 너무 뜨거워서였다고 해두자. 
 
한 사람이 머리에 닭 백숙을 인 채 자신들을 관람 중인 나를 발견했다. 그가 우뚝 멈춰 서서 가만히 말했다. 
"밥 왔소"깔깔깔깔, 첨벙첨범, 개울의 소란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마치 꿈이었던 듯 사위가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아이였던 사람들이 일순간 어른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팬티 차림이었다. 침입자가 된 기분으로 나는 뒤돌아섰다. 나는 이십대 상욱씨는 사십 대, 나는 인텔리 상욱 씨는 농민, 나는 샐쭉 고객만 숙이고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채 돌아셨다. 
 


 

오전 열시, 염이 시작됐다.  금속 침대 위에 놓은 아버지의 모습은 임종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염사가 능숙한 솜씨로 아버지의 몸을  한쪽으로 틀어 미리 시신 밑에 깔아 둔 수의를 잡아당겼다. 아버지의 몸이 하얬다.
 
늘 새까맣게 그을었던 얼굴도 핏기가 가신 탓인지 평소보다 하얬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본디부터 새까만 줄 알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별명이 늘 깜씨였고, 누구라도 아버지 닮아 그런 줄 알았다. 아닌 것을 나만 알았다. 
 


네살 때였나. 무슨 일이었는지 아버지와 나 둘이 읍내를 다녀오는 길 내 기억은 아버지가 알몸으로 섬진강에서 걸어 나오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여름이라 강까지 걸어오느라 땀을 흠뻑 흘렸던 터였다. 장날이 아니었는지 오가는 사람도 없고 뱃사공을 불러도 대답이 없고, 아버지는 땀을 식히기 위해 미역을 감았다.
 
나는 왜 강물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버지는 별 생각없이 옷을 벗어 둔 , 그러니까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몸 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노상 나를 목욕시킨 아버지였고 , 여름이면 무수히 계곡에서 놀았을 테지만 그런 날들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날, 나는 나를 향해 걸어 오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몸에는 러닝셔츠 자국이 선명했다. 러닝셔츠 입었던 상체부위와 바지에 가려진 하체는 하얗고, 가려지지 않은 부위는 새까맸다. 그게 우스워 깔깔거리던 내 눈에 낯선 무엇인가 눈에 띄었다. 
 
아버지의 다리 사이에서 나에겐 없는 것이 달랑 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싶어 나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시선을 느낀 아버지가 게처럼  옆걸음으로 속도를 높여 후다닥 옷을 입었다. 그 순간 나는 내 인생  최초의 깊은 슬픔을,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결여를 느꼈다.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 나에게는 없다! 다음 날부터 나는 아버지 처럼 서서 오줌을 눴다. 그런다고 나에게 없는 것이 생기지는 않았다. 번번이 팬티와 바지를 적셔 어머니에게 지청구를 들었을 뿐이다. 그 기억이 안개에 잠긴 섬진강처럼 흐릿하게 남아있었고, 아버지의 시신을 보자 또렷하게 되살아 났다. 
 


클레멘타인

 

아버지의 빨치산 동료들은 저녁을 먹자마자 잡아 놓은 숙소로 향했다. 노인네들이라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을 터였다 .밤 여덟 시, 서울 손님들과 노인네들이 모두 돌아간 접객실은 오랜만에 한갓졌다. 
 
밤이 깊었다. 장례식장에는 나와 아버지뿐이다. 같이 있어주겠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지만 다 돌려보냈다. 
냉동고에 있는 아버지와 나, 정말로 둘뿐인 것이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돌아온 뒤로 처음이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동트기 직전, 강 건너 지리산은 거푸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차 한 대 지나지 않는 아스팔트 길도 검푸르렀다. 그 길 어디쯤에서 울음 같기도 노래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소리를 향해 걸었다. 노랫소리였다.
 

  •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 모르는 딸 있네 

 
클레멘타인은 내가 처음 배운 노래였다. 
음치였던 아버지에게. 국민학교에 입학한 첫 음악시간, 선생님이 부르라기에 자랑스럽게 불렀다가 아이들의 웃음을 샀다. 나는 클레멘타인을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어머니  밤 마중을 가면서 배웠다.  나중에 원곡의 슬픈 사연을 들었다. 
 
골드러시 때, 금광을 찾으려고 딸과 함께 대륙을 횡단한 사내는 캘리포니아 협곡에 정착했다. 사내는 딸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금을 캤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인 클레멘타인이 계곡으로 떨어져 거친 강물에 힙쓸리고 말았다. 그렇게 사라진 딸을 아버지가 애달프게 찾는 노래 클레멘타인. 두 여자는 일곱 살의 나와 똑같이 틀린 음으로  클레멘타인을 부르고 있었다. 
 

  •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 늙은 아비 홀로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노래와 달리 떠난 것은 아버지였지만 볼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밤마다 창살 안을 서성이며 클레멘타인을 부르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아버지는 왜 하필 하고 많은 노래 중에 클레멘타인을 제일 처음 알려주었을까? 병보석으로 잠시 나온 것이니 이별을 예감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내 기척을 느꼈는지 노래가 툭 끊겼다. 
 


반내골까지 가는 동안 나는 간혹 창문을 열고 아버지의 유골을 조금씩 흩뿌렸다.  이 길 어디에 아버지의 어떤 기억이 남아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반내골은 조용했다.  아버지가 소년처럼 첨벙거리며  뛰어다니던 개울에도. 어떤 일이든 에너지랄지 기운 같은 게 남아 저 홀로 외로워하고 있다면 부디 화해하기를 바라면서.
 
혈육보다 이데올로기를 택했던 아버지의 한점 영혼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고 오줌을 싸며 혼절한 아홉 살 작은 아버지의 감당하기 어려운 쓰라림을 어루만져주길 바라면서. 학수와 나는 말없이 읍내로 돌아왔다. 


 
오거리에 차를 세웠다. 내리려던 아이가 뭔가를 보고는 내손을 확 낚아챘다. 엉겁결에 내려 끌려간 곳은 오거리 슈퍼 맞은편, 편의점 맞은편, 오거리의 정중앙, 하동댁 가게가 있던 자리였다. 낡은 함석집은 사라지고 새 건물이 들어섰지만 삼각형 가까운 이상한 모양새는 여전했다.
 

"할아버지가 그랬는디, 언니가 여개서 썽을 냈담서? 할배가 아줌마 궁둥이 두들겠다고?"

아무튼 아버지는 제 허물도 제입으로 까는데 선수다. 그것도 이 어린아이를 상대로.

"그때게 할아버지 맴이 이상하더래. 아버지라는 것이 이런 건갑 보다, 산에 있을 적 보담 더 무섭더래. 경찰보담 군인보담 미군보담 더 무섭더래."

아버지 유골을 손에 쥔 채 나는 울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이상한 인연 둘이 말없이 내 겉을 지켰다. 그들의 그림자가 점점 길어져 나를 감쌌다. 오래 손에 쥐고 있었던 탓인지 유골이 차츰 따스해졌다. 그게 나의 아버지 ,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 나의 아버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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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도 머무는 웃음

《정지아 작가 트라우마센터 8월 치유의 인문학 북콘서트에도 참석했다.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는 정지아 작가에게 졌다. /남는건 사람인데.....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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